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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 설교자의 확신
    2024-06-18 07:52:51   read : 1165  내용넓게보기.   프린트하기

    설교자의 믿음
    --설교자는 청중보다 먼저 자신을 감동시키라 --

    목회자들에게 강의를 하면서 물어본다. 목회가 재미있고 보상이 많다고 생각하는 이가 얼마나 되는가이다. 긍정적으로 대답하는 분들이 1할이 안 된다. 큰 문제가 아닐 수 없다. 무엇보다도 목회가 신나고 설교하는 일이 즐거워야 하는데 실상은 그렇지 못한 것이다. “주의 종”은 고통스럽기만 한 것이 현실이다.

    하나님이 모든 것을 다 공급하시는 왕이며 아버지라면 신자의 삶이 기뻐야 한다. 특별히 전문가인 목회자는 더욱 그러해야 한다. “모든 일에 우리를 사랑하시는 이로 말미암아 우리가 넉넉히 이기느니라”(롬 8:37)고 하지 않았던가. 설교자에게 이 말씀이 사실이 아니라면 누가 신앙을 얻을 수 있겠는가.

    설교자와 확신

    믿음이 없이 설교한다면 어떻게 될 것인가? 효과는 아주 적어진다. 내 마음 속에 일어나는 일을 어떻게 사람들이 짐작하겠는가하고 생각할지 모른다. 그러나 마음에서는 힘이 분출되고 있다. 믿음을 가지고 말하면 주위의 상황을 강하게 움직인다. 물론 듣는 청중의 마음도 함께 따라서 반응하기 마련이다.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누구든지 이 산더러 들리어 바다에 던지우라 하며 그 말하는 것이 이룰줄 믿고 마음에 의심치 아니하면 그대로 되리라.”(막 12:23) 이는 믿음이 모든 상황을 실제로 움직인다는 말씀이다. 믿음은 절대로 심리학적인 차원으로 끝나는게 아니다. 메가톤급의 폭탄보다 강한 것이다.

    그런데 만약 설교자에게 믿음에 대한 확신이 없다면 무슨 설교를 할 것인가? 그것이 무엇이건 절대로 성경적인 믿음은 심어줄 수 없다. 믿음은 다 좋은 것은 아니다. 부정적인 것도 믿음이다. 자기의 약함을 믿고 열등한 것을 믿고 실력이 없고 병든 것을 믿을 수 있다. 이 믿음은 자기를 파괴해 갈 것이다.

    믿음은 하나님이 내게 해 주신 일에 대한 지식에 근거한다. 하나님이 내게 해 주신 일이 무엇인지, 그래서 내가 어떤 존재가 되었는지를 믿는다면 거기 해당되는 능력이 나온다. 많은 신자들은 하나님이 이러한 복음적인 지식보다는 자기의 감각을 통해서 오는 경험의 지식을 더 믿는다. 그 믿음은 약하게 만든다.

    모세는 40년을 실패자로 지냈다. 그는 자기의 경험을 믿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그를 새롭게 정의해 주셨다. “내가 누구입니까”라는 질문에 “내가 정녕 너와 함께 하리라”는 대답을 하신다. 즉 “하나님이 함께 하는 자”가 모세의 정체였다. 모세는 말씀에서 온 이 믿음을 경험에서 나온 옛 믿음과 대치했다.

    칼빈은 믿음이 곧 확실성에 있다고 선언한다. “하나님의 자비를 생각하면서도 거의 아무 위로를 받지 못하는 사람들이 많다. 이들은 하나님의 선하심을 확신하는 듯하면서도 그것을 너무 좁은 범위 내에 국한시킨다. 그래서 하나님이 자기에게 자비를 베푸실까 의심하며 비참한 불안에 눌려지낸다.”

    그 결과로 그 믿음은 능력을 주지 못한다. “그러므로 사람의 정신에 힘과 확고한 평안을 주지 못하고 불안한 의심으로 괴롭힌다.” 여기에 사로잡히면 목회자도 없다. 그리고 오랫동안 이러한 상태로 지난다면 목회의 능력은 고갈되어 버리고 만다. 당연히 설교도 아무런 권능을 발휘할 수 없게 된다.

    “그러나 이와 다른 완전한 확신을 느낄 수 있는데 성경은 이런 확신이 항상 신앙에서 기인된다고 한다. 우리를 위해 명백히 나타난 하나님의 선하심을 의심할 여지가 없게 만드는 것이 바로 이 믿음이다. . . . 그래서 사도는 믿음에서 확신이 나온다고 하며 확신에서 담력이 생긴다고 한다.” 신앙은 확신이다.

    하지만 대부분의 신자들에게 이러한 확신의 신앙은 좀처럼 없다. 설교자들도 마찬가지이다. 그러한 확신을 갖기에는 오감을 통해 오는 경험이 너무 거리가 멀다. 늘 보고 듣고 느껴서 마음 속 깊이 쌓인 것은 실패요 좌절이요 약함이요 불신앙이다. 설교자는 설교하기 전에 먼저 복음을 자신에게 확신시켜야 한다.

    잠재의식에 눌린 믿음

    어느 교회에서 집사 하나가 감사헌금을 내면서 몇 자 적었다. “하나님 우리 목사님의 설교가 좀 더 복음적으로 되게 해 주시기 바랍니다.” 이 글을 읽으며 목사는 감사를 표현했다. 그리고 열심히 준비하겠다고 말했다. 다음 주에 또 같은 내용이 적힌 봉투가 올라왔다. 이번에는 목사가 아무 말도 하지 않고 넘겼다.

    그러나 그 다음 주에 같은 내용은 또 올라왔다. 매 주 그 내용이 올라오는 것이다. 그렇게 집사가 감사하면서 기도를 하면 점점 더 목사의 설교가 확신이 생겨야할 것이다. 그러나 결과는 그 반대였다. 목사는 설교를 하면서 자신이 없어하는 태도였다. 몇 달이 지나자 목사의 설교는 아주 엉성한 것이 되고 말았다.

    왜 그런가? 그 봉투만 생각하면 목사는 신경이 아주 예민해 졌다. 설교를 준비하자면 그 집사의 얼굴이 떠올랐다. 그러면 아무 생각도 떠오르지 않았다. 힘이 빠지면서 설교에 대한 모든 자신이 사라지고 만다. 가능하면 설교를 안하려고 한다. 이미 그 집사의 글이 잠재의식 속에 깊이 뿌리 내리고 만 것이다.

    고통스러운 경험은 잊혀지지 않고 깊이 기억된다. 의식에 떠올라있지 않아도 무의식 속에 상처가 깊이 남아있다. 사람들은 누구나 아픈 경험을 가지고 있다. 그것이 치료되지 않고 깊이 새겨져 있다면 무의식은 계속 그것에 대한 두려움을 내어 보내기 마련이다. 근원을 알 수 없이 올라오는 불안이 그것이다.

    외로운 사람은 세상을 외롭게 본다. 피해를 당한 사람은 세상에 악한 사람으로 채워져 있다고 생각한다. 몸이 약한 사람은 그것을 늘 생각한다. 가난한 사람의 의식구조는 완전히 가난에 절어있다. 이런 사람들은 복음을 받아들여도 역시 자기 의식 구조에 맞추어서 이해한다. 복음은 주된 사고를 형성하지 못한다.

    사기 당하는 사람은 다시 사기를 당한다. 그렇게 조심하고 모든 방법을 강구하지만 또 당한다. 사업에 실패하는 사람은 조심하지만 또 실패를 경험한다. 나쁜 습관의 사람들은 그 습관을 벗어나지 못한다. 이처럼 아픔의 사고는 사람을 지배한다. 그래서 늘 무의식 가운데 그 사고에 사로잡히게 마련이다.

    이것이 영상화이다. 사람은 스스로 생각하는 자기 모습을 그대로 닮아가는 경향이 본성 깊은 곳에 있다. 우리 의식 속에 어떤 영상이 그려져 남아있게 되면 정신작용을 통해 무의식에 스며든다. 일단 거기 저장이 되면 그것이 사람을 지배하게 되고 그리고 나아간다는 원리이다. 좋건 나쁘건 영상화의 결과이다.

    성경에서 계속해서 말씀하는 것이 “두려워말라”는 것이다. 예수께서도 계속해서 걱정하지 말라고 하지 않으시던가. 두려움과 걱정과 불안은 모두가 불신앙의 요소이다. 이것이 일어나는 것을 막을 수는 없지만 거기 사로잡히는 것은 신자의 할 일이 아닌 것이다. 일단 여기 잡히면 신앙은 그림자도 없다.

    그러면 어떤 일이 일어나는가? “나의 두려워하는 그것이 내게 임하고 나의 무서워하는 그것이 내 몸에 미쳤구나. 평강도 없고 안온도 없고 안식도 없고 고난만 임하였구나.”(욥 3:26) 사람은 생각하는 동물이요 그 생각이 그 사람의 삶을 만들어낸다. 누구든 현실이 불만스럽다면 그것은 자기 생각의 결과다.

    “땅이여 들으라 내가 이 백성에게 재앙을 내리리니 이것이 그들의 생각의 결과라 그들이 내 말을 듣지 아니하며 내 법을 버렸음이니라.”(렘 6:19) 사실상 생각은 피할 수 없는 것이다. 자기 경험을 어찌 생각하지 않을 수 있겠는가. 하지만 하나님의 말씀보다 아픈 경험이 더 강하다면 신자라 할 수 없다.

    마찬가지로 오랜동안 부정적인 경험이 목회자에게 쌓여왔다면 대단히 불행한 일이다. 앞으로는 더 부정적인 경험이 기다리고 있을 것이다. 그 부정적인 경험에 지배되어 무의식적으로 그것을 생각하고 있기 때문이다. 하나님은 말씀하신다. “네 재앙이 바로 다른데 있는게 아니다. 네 불신앙적인 생각 때문이다.”

    복음으로 생각을 바꾸라

    회개는 생각을 바꾸는 것이다. 헬라어 “메타노이아”란 생각을 바꾼다는 것이다. 뉘우치는 것만으로는 회개가 되지 않는다. 자기의 잘못을 뼈아프게 자꾸만 생각한다면 다시 그 잘못에 빠지게 된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말씀을 받아들여 새롭게 생각을 해야 한다. 그 생각을 들어보면 그 사람의 믿음이 보인다.

    아무리 성경구절을 많이 알고 신학을 많이 배웠더라도 별 수 없다. 그 모든 지식이 부정적으로 조합된다면 아무런 힘을 쓸 수 없다. 늘 냉소적이고 늘 비판적이지만 아무 것도 신나는 일은 벌어지지 않는다. 하늘의 복은 오직 정신적인 것으로 만족해야 할뿐이다. 그리고 죽은 뒤에야 경험되는 일들이다.

    구원받아 다시 태어난 새사람은 새로운 경험을 한다. 새사람은 새로운 생각을 하기 때문이다. “새사람을 입었으니 이는 자기를 창조하신 이의 형상을 좇아 지식에까지 새롭게 하심을 입은 자니라.”(골 3:10) 다시 말해서 예수를 믿어도 새사람의 경험을 하려면 지식에까지 새롭게 하심을 입어야 한다는 것이다.

    예수를 수십 년 믿었지만 성경에 나타난 엄청난 일들은 아무 것도 경험되지 않는다. 그러므로 신약의 기적들이나 놀라운 일들은 그 당시에나 해당되고 사도들에게만 주어진 것이라고 애써 자위해 본다. “하나님의 나라는 말에 있지 아니하고 오직 능력에 있음이라”했지만 자신과는 거의 상관없는 일이다.

    스스로 판단해 보라. 어떤 일을 하기 전에 무엇을 생각하는가? 최악의 경우를 먼저 생각하고 준비해 놓는가? 그러면 반드시 그것이 온다. 그러면 뭐라고 말하는가? “거봐라. 내가 뭐랬는가. 최악의 경우를 준비하라고 했지. 자 이제 그것이 왔지 않은가. 준비를 했으니 얼마나 잘 되었는가!” 과연 그럴까?

    이것은 하나님을 무시하는 행동이요 한 마디로 불신앙의 마음이다. 하나님이 동행하신다. “볼찌어다 내가 세상 끝날까지 너희와 항상 함께 있으리라”고 하셨는데 어째서 최악을 생각하는가? 동행하시는 성령을 이렇게 모욕할 수 있겠는가? 그러므로 그 생각하는 것이 그대로 임하지 않고 무엇이 오겠는가!

    신자는 교회 열심히 나가는 사람이 아니다. 믿는 자는 하나님을 믿어 생각이 바뀐 사람이다. 생각을 바꾸는 최고의 목표는 예수 그리스도와 같은 사고를 하는 것이다. 나사로의 무덤에서 하시는 말씀 “아버지여 항상 내 말을 들으시는 것을 감사합니다”의 수준이 되어야 한다. 그를 흉내내기만 해도 된다.

    믿음은 말씀에서 온다. “믿음은 들음에서 나며 들음은 그리스도의 말씀으로 말미암았느니라.” 사람들은 의사의 말을 절대적으로 믿는다. “암입니다. 삼 개월 남았습니다.” 그러면 그 즉시로 암환자가 되고 그의 생명은 삼 개월 뒤에 꺼진다. 의사의 말씀을 들음으로 거기에 대한 흔들리지 않는 믿음이 생긴 것이다.

    복음적인 믿음은 설교자의 입에서 나오는 좋은 소식에서 온다. 이 소식은 성경 내용의 핵심이요 하나님이 자신의 명예를 걸고 하신 말씀들이다. “누구든지 저를 믿는 자는 부끄러움을 당하지 아니하리라”고 하신 대로이다. 설교자는 이렇게 좋은 말씀을 그대로 아무 것도 첨가하지 않고 전해주어야 한다.

    그것은 사도 바울이 하신 그대로이다. “우리는 수다한 사람과 같이 하나님의 말씀을 혼잡하게 하지 아니하고 곧 순전함으로 하나님께 받은 것 같이 하나님 앞에서와 그리스도 안에서 말하노라.”(고후 2:17) 복음의 내용이 너무도 엄청나더라도 그대로 전하라. 자신도 믿고 남도 믿게 해 생각을 바꾸게 하라.

    율법은 좋은 소식이 아니다. 그것은 끝없는 행위의 길이요 잘못하면 저주를 받는 무서운 하나님의 말씀이다. 반면에 복음은 좋은 소식이다. 그리스도께서 그 율법을 다 완성해 주셨다는 소식이다. 그러니 그 사실을 믿기만 하라는 말씀이다. 그러면 율법을 완성한 사람이 받는 축복을 누린다는 내용이다.

    복음 말씀의 권능

    우리는 말씀으로 다시 창조된 존재이다. “그가 조물 중에 우리로 한 첫 열매가 되게 하시려고 자기의 뜻을 좇아 진리의 말씀으로 우리를 낳으셨느니라.”(약 1:18) “너희가 거듭난 것이 썩어질 씨로 된 것이 아니요 썩지 아니할 씨로 된 것이니 하나님의 살아있고 항상 있는 말씀으로 되었느니라.”(벧전 1:23)

    복음의 말씀은 영생을 준다. 말씀이 없었더라면 구원도 대속도 새창조도 알 수 없었을 것이다. “누구든지 그리스도 안에 있으면 새로운 피조물이라 이전 것은 지나갔으니 보라 새것이 되었도다.”(고후 5:17) 새로운 존재가 되었다는 확신이 무의식 속에 깔려있는 병과 실패와 부끄러움의 경험을 눌러야 한다.

    복음은 예수께서 구원을 다 이루셨다고 선언한다. 단지 그것을 인정하고 믿기말 하라는 것이다. 오감이란 감각기관을 통해서 보는 우리는 전혀 복음의 내용과 다를 수 있다. 그러기에 “오직 마음을 새롭게함으로 변화를 받아 하나님의 선하시고 기뻐하시고 온전하신 뜻이 무엇인지 분별하도록 하라”(롬12:2)신다.

    마음은 말씀을 공부하고 그대로 행동함으로 새로워진다. 여러 해 동안 성경을 공부했어도 그대로 행동하고 그대로 살지 않으면 말씀의 행위자가 아니며 마음은 새로워지지 않는다. 야고보는 비밀을 말한다. “너희는 도를 행하는 자가 되고 듣기 만하여 자신을 속이는 자가 되지 말라.”(1:22) 하늘백성의 경험을 하라.

    “너희가 내 안에 거하고 내 말이 너희 안에 거하면 무엇이든지 원하는 대로 구하라. 그리하면 이루리라.”(요 15:7) 여기서 말씀은 우리 안에 거하신다. 그리하여 생각을 바꾸어 새로운 열매를 만들어낸다. “너희가 과실을 많이 맺으면 내 아버지께서 영광을 받으실 것이요 너희가 내 제자가 되리라.”

    그것은 단지 말씀을 기억하는 정도가 아니다. 기억하는 것도 중요하다. 하지만 더 중요한 것은 말씀이 우리 존재의 핵심부분이 되게 하는 것이다. 말씀이 우리 속에 사는 것이다. “믿음으로 말미암아 그리스도께서 너희 마음에 계시게 하옵시고 너희가 사랑가운데서 뿌리가 박히고 터가 굳어져서...”(엡 3:17)

    그리스도와 말씀은 하나이다. 말씀이 우리 속에 거하는 것이 그리스도가 개인적으로 우리 속에 거하는 것과 같다. 말씀에게 우선권을 주는 것이 곧 그리스도에게 우선권을 주는 것이다. 말씀이 우리 속에서 지배해야 그리스도는 우리의 주가 되신다. 그러면 무의식까지 지배하던 부정적 사고는 사라진다.

    “지금 내가 너희를 주와 및 그 은혜의 말씀에 부탁하노니 그 말씀이 너희를 능히 든든히 세우사 거룩케 하심을 입은 모든 자 가운데 기업이 있게 하시리라.”(행 20:32) 여기 은혜의 말씀이 명령한다. 이처럼 말씀이 개개인에게 그리스도의 성품을 세워주고 아버지가 가진 사랑의 성품을 심어준다.

    다른 말로 하면 하나님은 말씀이 우리 영의 본성을 지배하고 만족시킴으로 자신을 우리 속에 세워주고 자신을 우리의 한 부분이 되게 해 주신다. 말씀에 관한 철학이나 이론을 통해서는 사람이 영적으로 서지 못한다. 말씀 안에서 살아있음과 우리 속에 살아있는 말씀을 통해서만 영적으로 된다.

    “네가 만일 네 입으로 예수를 주로 시인하며. . .입으로 시인하여 구원에 이르느니라.”(롬 10:9-10) 의지할 것은 내 입에 있는 말씀이다. 그 말씀은 신자의 입술에서 살아있는 존재가 된다. 불신자를 회개하게 한다. 말씀대로 행동할 믿음을 준다. 그것이 신자로 하여금 “마음을 다하여 여호와를 의뢰”하게 한다.

    내 말이 하나님의 말씀이 되며 내 입술은 하나님의 대사가 된다. 내 마음에서 사랑으로부터 새롭게 나온 내 입의 하나님 말씀은 듣는 자의 마음에 불을 일으킨다. 여기서 설교자의 아름다운 사역이 나타난다. 설교자는 청중에게 말씀을 줌으로 신앙을 얻게 한다. 그리하여 그들의 마음에 하늘나라가 임하게 한다.

    설교자 자신부터 설득하라

    설교자는 설교하기 전에 자기에게 충분히 설교를 해야 한다. 그래서 성경의 말씀을 믿어 마음 속 깊은 무의식에까지 복음이 깊이 젖어있게 해야 한다. 수영할 때 숨쉬고 손발 움직이는 것은 외어서 하지 않는다. 운전하다 브레이크를 밟을 때는 무의식적이다. 이처럼 복음 말씀대로 생각이 자연스럽게 되게 하자.

    옷 만드는 사람은 옷부터 본다. 치과 의사는 자기도 모르는 사이에 이를 본다. 율법적인 신자는 남을 비판한다. 자기도 못하면서 고상한 행동을 주장한다. 복음적인 신자는 복음의 말씀대로 인생을 본다. 복음적 사고가 복음적 말을 하게 하고 말은 다시 사고를 강화한다. 복음적 생각과 말은 신비한 능력을 준다.

    “너희는 택하신 족속이요 왕 같은 제사장들이요 거룩한 나라요 그의 소유된 백성이니.”(벧전 2:9) 이 말씀만 믿어도 우리는 즉시 엄청난 존재가 된다. 우리가 왕이요 제사장이요 하나님 나라이다. 그렇다면 우리의 삶을 향해서 명령할 수 있는 존재가 된 것이다. 그러나 얼마나 자주 자기의 삶을 향해 명령하는가?

    “나는 포도나무요 너희는 가지니.” 이보다 더 강력하게 신자의 정체를 표현한 게 없다. 주는 자신을 우리와 하나로 동일시하신다. 그와 우리는 한 몸이다. 성찬식이 그것을 매번 선포한다. 그렇다면 그 사실을 믿어야 한다. 그러면 자신은 작은 그리스도요 풍랑을 향해 귀신을 향해 삶을 향해 명령하는 존재이다.

    이러한 말씀을 토대로 자신을 생각해야 한다. 처음에는 생소하게 느껴질 것이다. 이 말씀을 조건 없이 자신에게 반복해서 말하라. 이스라엘은 말씀을 미간과 소매에 그리고 문지방에 써 붙였다. 무의식까지 지배하게 하려는 것이다. 이러한 복음적 말씀으로 새롭게 자신을 정의해 보자. 자신의 마음을 설득시키라.

    “나는 하나님의 아들이다. 하나님은 나를 위해 모든 것을 주신다. 하나님의 지혜와 능력과 거룩과 구원이 내게 있다. 그밖에도 우주를 움직이는 모든 게 다 내 속에 있다. 이것을 근거로 나는 운명을 지배하며 산다.” 이 내용을 반복해 보라. 그러면 마음은 이 말에 맞추어 움직인다. 그리고 삶도 그렇게 펼쳐진다.

    기도는 다른게 아니다. 이렇게 복음의 말씀으로 자신을 확인하는 것이다. 부정적이고 불신앙적인 기도는 오래할수록 신앙에 손해를 준다. 하나님의 자녀로서의 사고로 최상의 것을 요구하는게 기도요 하나님과 주파수를 그분의 생각이 말씀을 통해 마음에 들어오도록 교제하는게 기도이다. 가능하면 자주 기도하라.

    반복해서 복음을 말해 마음을 지배하게 하라. 그러면 어느새 그렇게 된다. 이것은 암시가 아니라 진리를 인정하는 것이다. 그동안 비진리에 너무 오래 젖었기 때문이다. 이스라엘 사람들도 애굽에서 나와서 바로 가나안에 들어가지 못했다. 애굽에서의 경험과 노예의 사고를 고쳐야 했다. 우리도 그렇다.

    특히 설교하기 전 설교자는 자신의 설교에 확신을 가져야 한다. 청중이 감동을 받고 변화되는 것을 믿음의 눈으로 보라. 적어도 그것은 할 수 있다. “믿음은 바라는 것들의 실상이요 보지 못하는 것들의 증거”이다. 그리고 이것을 유지하라. 확신을 가지고 설교할 수 있다. 그리고 이 확신이 상황을 바꾸어준다.

    왜 그런가? 신자는 하나님 앞에서 왕이요 제사장이기 때문이다. 우리의 생각이 우리 삶에 그대로 투영된다는 사실을 안다면 복음적인 생각은 필수적인 것이 된다. “악인에게는 그 두려워하는 것이 임하거니와 의인은 그 원하는 것이 이루어지느니라.”(잠 10:24) 두려운 것을 생각하는 것이 악이다.

    “육신을 좇는 자는 육신의 일을, 영을 좇는 자는 영의 일을” 어떻게 하는가? “생각한다”고 한다. “육신의 생각은 사망이요 영의 생각은 생명과 평안이니라.” 자기의 생각을 확인해 보라. 사망으로 가는 모든 부정적 사고는 육신의 생각이요 생명과 평안을 주는 것은 영의 생각이다. 영의 일을 생각하라. 보상이 크다.

    설교하는 일을 감사하고 재미있어 하라. 그러면 감사하고 재미있는 일이 된다. 목회에 대해서도 그렇다. 장래를 향해서 왕으로서 제사장으로서 교만한 마음이 아닌 그리스도의 마음(고전 2:16)으로 명령하라. 자기 설교로서 먼저 자신을 감동시키라. 그리고 설교자 자신부터 왕이요 제사장됨을 누려보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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