빌4:10-20/ 자족의 비결 / 한경직 목사 2014-08-27 14:04:43 read : 27123 내용넓게보기. 프린트하기
“내가 궁핍하므로 말하는 것이 아니라 어떠한 형편에든지 내가 자족하기를 배웠노니 내가 비천에 처할 줄도 알고 풍부에 처할 줄도 알아 모든 일에 배부르며 배고픔과 풍부와 궁핍에도 일체의 비결을 배웠노라 내게 능력주시는 자 안에서 내가 모든 것을 할 수 있느니라” 이미 읽은 말씀 가운데서 빌립보서 4장 11절로 13절까지 다시 봉독하였습니다.
이 몇 절 가운데서 우리는 사도 바울이 스스로 자기 생활에 대한 간증을 들을 수 있습니다. 그는 어떠한 형태에든지 자족을 배웠다, 그래서 비천에 처할 줄도 알고 풍부에 처할 줄도 알아 모든 일에 배부르며 배고픔과 풍부와 궁핍에도 일체의 비결을 배웠노라 간증합니다.
우리는 어떠합니까? 자족의 비결을 배우는 것은 매우 필요합니다. 자족이란 말의 반대되는 말은 아마 불만, 불평, 혹 원망, 이런 말들일 것입니다. 불만과 불평은 어떤 경우에는 필요합니다. 가령 무식한 이가 그 무식에 대한 불만이 있을 때에 공부할 의욕이 생길 것입니다.
혹은 극빈한 가정이 그 빈곤에 대한 불만이 있을 때에 가정 생활을 개선하기 위해서 좀더 노력을 하게 될 것입니다. 불의, 부정, 부패에 대한 국민의 불만이 있을 때에 사회정의를 위해서 그 국민들이 좀더 투쟁하게 될 것입니다. 범사에 개선할 것은 개선해야 되고 향상할 것은 향상하도록 노력하여야 될 것입니다.
그러나 인간은 누구나 때로는 내 자신이 고칠 수도 없고, 피할 수도 없는 불가항력의 경우를 당할 때가 있습니다. 가령 불치의 병, 불구의 몸, 피할 수 없는 짐, 부득이 져야 할 내 십자가, 부득이 당하여야 할 고난, 부득이 당하여야 할 환경 혹은 역경, 이런 데에 계속해서 불만, 불평, 원망만 한다고 하는 것은 백해에 무익합니다. 백번 해(害)가 있을지언정 한 푼의 이(利)는 없습니다. 우선 아무 쓸데가 없습니다.
원망한다고 짐이 가벼워지는 것 아닙니다. 쓴 잔이 달아지는 것이 아닙니다. 괴로움이 적어지는 것도 아닙니다. 환경이 변하는 것도 아닙니다. 오히려 내 자신에게만 악영향을 줄 겁니다. 얼굴에는 주름살 하나라도 더 생기게 되고, 머리에는 머리카락이 하나라도 더 희어지게 될 것입니다. 원망이 많은 사람이 그렇습니다.
그뿐만 아닙니다. 다른 이에게도 악영향을 줍니다. 가정에 이런 불만과 원망을 하는 가족이 하나만 있어도 온 가족이 불안하여집니다. 가정에 주부가 이런 여자라고 하면, 남편의 맘이 불안하여지는 것은 말할 것도 없고, 아이들도 밖에 나갔다가 집안에 들어오기를 싫어합니다. 집이 넉넉하나 안 하나 자족의 비결을 배워야 가정이 화평합니다.
옛날 이스라엘 백성이 광야에서 범한 죄 가운데 하나는 이 원망의 죄이올시다. 그들은 부득이 광야를 지날 수밖에 없는 운명이었습니다. 가나안 복지에 들어가려면 광야를 지날 수밖에 없었습니다. 물론 광야에 불편한 점이 많습니다.
그런데 그들이 불만과 불평을 계속해서 “애굽에서 떠나지 않았더라면 좋았을 것 아닌가?” “아, 우리가 애굽에 있을 때는 고기 가마 옆에서 살았는데.” 하며 먹을 것이 없다, 마실 물이 없다며 모세를 원망하고, 하나님을 계속해서 원망했습니다. 결과는 그들의 대부분이 가나안 복지에 들어가지 못했습니다.
신앙생활이 이와 비슷하다고 생각합니다. 우리가 신앙생활을 이런 세상에서 하는 것이 마치 이스라엘 백성이 광야를 지나는 것과 같습니다. 여러 가지 불편한 점이 많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자족의 비결을 배워야 영원한 안식에 들어갈 수 있는 것입니다.
그러면 자족의 비결을 어디서 배울 수 있습니까?
우리 동양의 성현도 이 자족에 대한 교훈을 많이 했습니다. 가령 <경행록(景行錄)>이라고 하는 책에 보면 ‘지족가락이요 무탐즉우라(知足可樂 務貪卽憂)’ 하는 말이 있습니다. ‘족한 것을 알면 가히 즐거워할 수 있고, 탐하기를 힘쓰면 근심만 더한다.’ 이런 말을 했습니다.
혹은 이런 말도 했어요. ‘지족자는 빈천하여도 역락이요, 부지족자는 부귀라도 역우니라(知足者 貧賤亦樂 不知足者 富貴亦憂).’ ‘족한 줄 아는 사람은 비천해도 또한 즐겁게 살고, 족한 줄 알지 못하는 사람은 부귀한 자리에서도 늘 근심만 한다.’는 뜻입니다.
또 이런 말도 했어요. ‘지족상족이면 종신불욕(知族常足 終身不辱)’하고, ‘족한 줄 알아 항상 족하게 여기면 종신토록 몸에 욕됨이 없고’, ‘지지상지면 종신불치(知止常止 終身不恥)’니라. ‘그칠 때를 알아서 항상 그칠 줄을 알면 그는 종신토록 몸에 부끄러운 일을 당하지 아니한다.’는 말입니다. 우리 동양의 성현도 자족을 배우라고 권고했습니다.
거기에 서양의 철학자들을 보면, 이 자족을 동양의 철학자들보다 더 강조해서 가르쳤습니다. 특별히 헬라의 철학 가운데 스토아학파에서는 이 자족이라고 하는 말, 바로 성경에 나오는 말입니다. ‘아우타, 아우탈케이아’라고 하는 말인데, 스스로 족하게 여기는 마음, 이 자족이라고 하는 말을 아주 강조해 가르쳤습니다. 사실 스토아학파 윤리의 최고 목표를 이 자족에 둔 것입니다. 그래서 그들은 인간이란 어떤 물건이나 어떤 인간도 필요로 하지 않는 자족의 마음을 가져야 한다고 강조했습니다.
그래도 그들은 방법을 두 가지로 제시했습니다. 첫째는 자족을 배우려면 먼저 욕망을 제거해 버려라. 둘째는 네 감정을 제거해 버려라. 그렇게 가르쳤습니다. 가령 욕망을 제거해 버리라고, 자족이란 물질을 많이 소유하는 데 있지 않고 욕망을 줄이는 데 있다고 가르쳤습니다. 일리가 있는 말인 줄 압니다.
“가장 부한 이가 누구입니까?” 어떤 분이 소크라테스에게 와서 물으니 그 노인이 얼른 대답하는 말이, “가장 작은 것에 자족하는 사람이니라.” 이렇게 대답했습니다. 전에 디오게네스라고, 스토아학파의 유명한 성자입니다. 그분은 일생토록 참 몸에는 짧은 바지 하나만 걸고 살았고, 자기 집도 없이 밤에 잘 때는 산기슭에 가서 나무통에서 잤다고 합니다.
한번은 헬라 나라의 왕이 이 성자를 찾아보려고 왔습니다. 찾아보려고 와서 “당신이 무엇을 원합니까? 원하는 것대로 내가 다 올릴 터인데, 원하는 것 있으면 말씀해 보세요.” 하니, 이분 하는 말이, “나는 원하는 것 하나도 없어요. 그저 왕께서 지금 내 앞에 서서 햇빛이 좀 가리워지는데, 그것만 좀 비켜주시오.” 그 얘기만 했다고 합니다. 욕망을 줄이라고 이렇게 가르쳤습니다.
또 그들은 좀더 아주 극단으로 나가 버려서 모든 감정을 제거해 버리라고, 애정의 감정도 제거해 버리라고, 자기 자신이나 다른 이에게 무슨 일이 생길지라도 무관심하게 될 때까지 모든 감정을 없애 버리라고 이렇게 가르쳤습니다. 그래서 그 스토아 철학에 유명한 사람 가운데 하나인 에피쿠로스라는 사람은 이렇게 예를 들어서 가르쳤습니다.
가령 우리가 밥 먹을 때 쓰는 그릇이나 컵이 하나 깨진다고 하자면, “그까짓 거 깨지면 뭐 어때? 나 그거 관심 안 둬.” 이렇게 얘기하라고. 그러다가 가령 우리 집에서 기르던 개나 고양이가 죽으면 “그까짓 거 죽으면 뭐라나? 난 그까짓 거 관심없어.” 이러라고 했어요. 그러다가 가령 내 다리가 부러지든지 팔이 부실하면 “아 그까짓 거 그렇게 되면 뭐하나? 나 상관 안 해.” 이렇게 하라고. 마지막에는 심지어 자기의 가장 가까운 이가 불행하게 되어도, 심지어 세상을 떠나도 “나 그거 상관 안 해. 나도 무관심이야.” 이렇게 될 때까지 무관심 상태에 들어가라고 했어요. 그러면 자족의 경지에 들어간다고 이렇게 가르쳤습니다.
그들은 인간을 목석으로 만들려고 했어요. 말하자면 사실 그런 까닭으로 실패했습니다. 그들은 인간의 의지력으로 모든 욕망을 억제하는, 감정도 제거하는 소극적 방법으로 자족의 마음을 성취하려고 애를 썼습니다. 그러나 결국 그것은 실패로 돌아갔습니다. 왜? 인간의 의지는 약합니다. 왜? 인간은 감정이 없는 목석이 아닙니다. 나무나 돌이 아닙니다. 인간은 욕망이 있는 존재요, 인간은 감정이 있는 존재인 것입니다.
바울이 어디서 자족의 비결을 배웠는가? 바울이 어떠한 환경에 살면서도 자족의 생활을 하였는가, 여러분 생각해 보셨습니까? 바울이 생활한 환경이 어떠했는가? 잠깐 들어보세요. 고린도전서 4장 11절 이하에 바울이 이렇게 기록했습니다.
“바로 이 시간까지 우리가 주리고 목마르며 헐벗고 매 맞으며 정처가 없고 또 수고하여 친히 손으로 일하며 후욕을 당한즉 축복하고 핍박을 당한즉 참고 비방을 당한즉 권면하니 우리가 지금까지 세상의 더러운 것과 만물의 찌끼같이 되었도다” 이런 환경에서도 그는 자족의 생활을 하였습니다.
좀더 들어보겠습니까? 고린도후서 11장 24절 이하에는 이렇게 기록했습니다. “유대인들에게 사십에 하나 감한 매를 다섯 번 맞았으며 세 번 태장으로 맞고 한 번 돌로 맞고 세 번 파선하는데 일주야를 깊음에서 지냈으며 여러 번 여행에 강의 위험과 강도의 위험과 동족의 위험과 이방인의 위험과 시내의 위험과 광야의 위험과 바다의 위험과 거짓 형제 중의 위험을 당하고 또 수고하며 애쓰고 여러 번 자지 못하고 주리며 목마르고 여러 번 굶고 춥고 헐벗었노라”
이런 환경 가운데 바울이 어떻게 자족의 생활을 할 수가 있었습니까? 그 비결이 어디에 있었습니까? 그것은 여러분 이미 들었어요. 빌립보서 4장 13절에 그가 기록했어요. “내게 능력 주시는 자 안에서 내가 모든 것을 할 수 있느니라” 그는 그에게 능력 주시는 그리스도 안에서 언제나 살았습니다. 그리스도는 어떤 환경에 그가 처하여 있든지 끊임없이 힘을 공급해 주었어요.
혹은 갈라디아서 2장 20절에는 이렇게 기록했습니다.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혔나니 그런즉 이제는 내가 산 것이 아니요 오직 내 안에 그리스도께서 사신 것이라” 그 안에는 그리스도께서 살아 계셨습니다. 골로새서 1장 27절에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이 비밀은 너희 안에 계신 그리스도니 곧 영광의 소망이니라” 그리스도께서 비밀히 그의 마음 속에 계셔서 언제나 영광스러운 소망을 공급한 것입니다.
피난 때에 제주도에 가서 구경한 분 많이 계신 줄 압니다. 제가 그 제주도 한림이라고 하는 곳에 가서 한 주 동안 있어 봤는데, 거기 가보면 물을 길러 어디로 가는가 하니, 다른 데 가지 않고 바다로 나갑니다.
물을 길러 바다로 나가요. 물 들어오면 전부 다 바다뿐인데, 밀물이 척 나가면 그 바다 속에 우물이 있는데, 그저 우물 속에는 생수가, 맑은 물이 콸콸 나와서 그저 그 우물에 가득 찹니다. 그래서 바닷속에 들어가서 맑은 물을 길어다 먹고 해야 돼요.
바울이 살았던 그 환경은 이와 같은 역경이지만, 그의 속에는 주님께서 계셔서 언제나 생수가 솟아났어요. 여기에 그의 비결이 있습니다. 그래서 그는 늙고 감옥에 앉았고 몸에는 언제나 찌르는 가시가 있고, 장래의 전망은 네로의 칼날뿐이었지만, 그는 “주 안에서 항상 기뻐하라. 내가 다시 말하노니, 나 같은 내가 다시 말하노니 기뻐하라.”고 했습니다. 그 안에 생수가 솟았어요.
며칠 전 저녁에 본브렌트 목사라고, 저 루마니아에서 와서 우리 교회에서 신앙 간증을 했지요? 그가 공산당 감옥에서 들어가서 그런 무서운 곳에서 두려워하지 아니하고 기쁨으로 지낸 그런 생생한 간증을 우리가 다 들었어요.
자족의 비결을 배워야 합니다. 비천함에 처할 줄도 알아야 합니다. 가난하다고 불평하지 맙시다. 우리 주님은 일찍이 말씀했습니다. “여우도 굴이 있고 공중에 나는 새도 깃들일 곳이 있으되 인자는 머리 둘 곳이 없도다” 우리가 늘 그렇게 가난하게 살려고 애쓸 것은 아니지만 우리가 기억할 것은 불의한 재물로 호화롭게 사는 것보다는 가난하게 사나 옳게 사는 데 참된 축복이 있는 것입니다.
비천할 때에 어떻게 처하는 비결을 우리가 배워야 합니다. 풍부에 처할 줄도 우리가 알아야 합니다. 옛날 아합왕 같은 이는 일국의 왕으로 모든 소유가 있건만 자기 집 옆에 있는 나봇의 포도동산을 탐내서 자족을 모르고, 남의 포도동산을 탐내다가 큰 죄를 범하고 마지막에는 그 가정이 멸망을 당한 이 얘기를 우리가 성경에서 읽어봅니다.
“그 아무개는 만족을 몰라.” 이런 말을 우리가 혹 듣습니다. 만족을 좀 알고 살아야 합니다. 한 가정이라면, 남편도 만족을 좀 알고 살아야 하고, 아내도 만족을 좀 알고 살아야 하고, 아들도 딸도 만족을 좀 알고 살아야 합니다.
그러므로 디모데전서 6장 6절에, “자족하는 마음이 있으면” 족한 줄 아는 마음이 있으면 “경건에 큰 이익이 된다”고 기록한 것입니다. 그러므로 히브리서 13장 5절에는, “돈을 사랑하지 말고 있는 바를 족한 줄로 알라” 그러고 친히 말씀하시기를 “내가 과연 너희를 버리지 아니하고 과연 너희를 떠나지 아니함이라 하셨느니라” 기록한 것입니다.
사실 불평과 원망은 내 심령의 상태가 고갈한 증거입니다. 그리스도를 중심에 영접하세요. 그리스도와 동행하세요. 그리스도로 생명의 양식을 삼으시고 생명수로 삼으세요. 그리하면 어떠한 환경에서나 어떠한 십자가를 지고도 기쁘고 감사한 나날을 보낼 수가 있는 것입니다.
“내게 능력 주시는 자 안에서 내가 모든 것을 할 수 있느니라” 이것이 자족한 생활의 비결입니다. 기도하십시다.
만복의 근본 되시는 우리 하나님 아버지시여, 이 시간 사랑하는 사도 바울의 자족의 비결을 저희들이 다시 한번 돌이켜 생각하였습니다. 그가 그처럼 말할 수 없는 고난과 역경과 육신의 고통 가운데서 이 모든 것을 극복하고 기쁘고 즐거운 생활을 했을 뿐더러 모든 사람들에게 주 안에서 기뻐하라고 외쳤습니다. 오 아버지 하나님이시여, 우리도 중심에 문을 열어서 주님을 이 시간 영접할 수 있게 하여 주시고, 주님 주시는 생명수로써 우리의 심령이 충만해질 수 있는 그 높은 은혜의 자리로 이 시간 우리 하나하나를 이끌어 올려 주시옵소서.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간절히 기도하옵나이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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