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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설교에 대한 설교자의 진실성
    2023-10-13 00:02:45   read : 3862  내용넓게보기.   프린트하기

          개신교회의 예배는 설교가 중심을 이룬다. 특히 선교 초기의 예배는 기독교를 모르는 사람, 다른 종교 혹은 미신을 섬기던 사람들에게 복음의 진리를 설명하고 가르침으로써 신앙을 그들의 의식과 생활 속에 심고 익히게 해야 했다. 그래서 예배에서 설교가 복음전파의 한 교육과정 같이 중요시 될 수밖에 없었다.
     
    예배와 설교
         우리나라의 교회는 바로 이런 전통을 받았고, 오늘날 우리의 강단도 그 흐름을 짙게 지니고 있다. 마치 설교를 위해 모든 예배순서가 짜여지는 느낌이요, 또 실제에 있어서도 그러하다. 예배를 인도하는 목사보다 설교하는 목사가 더 중시되고, 예배순서 중에 많은 횟수와 시간을 차지하는 찬양이 설교를 방조(幇助)하는 내용으로 짜여지게 된다. 이러한 경향은 미국의 대각성운동과 그 운동의 영향을 받았던 초기 미국선교사들에게서도 유래되었다. 그리고 우리나라 선교 초기의 소박한 기독교 계몽운동 성격과 전도집회와 그 뒤를 잇고 있는 부흥집회 등으로 토착되었다고 할 수 있다.
     
         그러나 알고 보면, 예배에서 설교 외의 순서는 설교를 위해 보조적 기능을 하는 순서가 아니다. 예배는 창조와 타락과 구원의 십자가와 부활, 그리고 최후의 승리 등 하나님의 전역사(全歷史), 즉 구속사의 전사역(全使役)을 포함하고 요약한 거룩한 드라마이다. 찬양과 간구와 봉헌과 사명의 다짐으로 요약되는 하늘나라의 축배다. 예배의 순서 속에서 하나님의 말씀이 선포되고 전파되는 것은 당연하지만 설교 자체가 예배인 것처럼 이해되거나, 인식되거나, 수용되는 것은 합당치 않다. 단 한 시간 안에 요약되는 예배에서 비록 설교가 차지하는 시간이 절반 정도를 차지하고 다른 순서는 지극히 짧다고 해서 다른 순서가 설교에 부속되거나 하위에 있어야 할 정도로 가벼운 것은 아니다. 짧은 순서는 시간이 짧은 만큼 그 내용과 표현의 중량이 더 무거워야 한다. 예배를 주관하는 목사는 일단 그의 설교에 모든 예배순서를 부속화, 방조 기능화 시켜서는 안 된다는 점을 이해해야 한다.
     
    한국교회의 설교 전통
         한국교회의 설교 전통이 ‘단순하고 소박한 성경강화’라는 점은 매우 축복받은 전통이다. 강단의 설교로서도 그러했지만 그것으로 미흡한 점은 소위 사경회 등으로 보충했다. 부흥회의 시초는 사경회였고, 사경회는 성경공부였다. 이 점은 매우 흥미로운 전통이다. 그런데 이 성경공부가 공부로서 진행되어 가는 과정에서 가르치는 자와 가르침을 받는 자간에 지적 축적과 지식전달의 영역을 넘어서 새로운 기적을 경험하게 했던 것이다.
     
         그것은 가르치는 자와 가르침을 받는 자가 다함께 그 ‘말씀을 받은 자의 자리’에 서게 되고, 그 말씀을 주시는 분을 만나는 체험을 하게 되었던 것이다. 마치 엠마오로 내려가던 두 제자가 성경토론을 하던 중에 또 한 분의 동행자를 만나게 되고, 그 두 사람의 성경토론은 세 사람의 대화로 깊어지고, 급기야 그 동행인이 다른 이가 아닌 말씀이 육신이 되신 그분이셨다는 점, 그리고 그 사실이 두 제자에게 알려지는 순간 잠시 몸으로 동행하셨던 그분은 그 두 사람 앞에서 몸의 존재는 감추어버리셨던 바로 그 사건이 성경공부 과정에서 재현되어 체험되었던 것이다. 이것은 빌립이 가사로 가는 길에서 에디오피아 여왕의 내시와 성경이야기를 함께 나누었을 때와도 똑같은 경험이었다. 즉 성경강화가 부흥회로 이어지는 경험이다. 이러한 체험을 반복해온 한국교회의 강단은 성경을 성경으로 고집스럽게 붙잡아 온 것이다. 성경은 학문의 대상, 배움의 매체로서만이 아니라 그 책 자체를 신앙의 대상으로 할 만큼 성경 중심적이었다.
     
         이러한 설교 전통의 극단화가 성경을 통하여 언제나 살아서 말씀하시는 하나님의 영의 역사(役事)를 극단적 성경숭배자들의 성경관이란 틀 속에 가두어버린 결과를 낳아서 오히려 과오를 범하기는 했다. 그러나 한국교회를 성경중심의 강단으로 지켜가게 했던 기본 동기만은 높이 인정해야 한다. 어쩌면 그것이 유대인들이 율법을 받고 성전을 세웠으나 오히려 율법과 성전 극단주의에 매여 버렸던 것과 같은 과오라 할 수 있다. 그러나 그렇다고 이스라엘 민족의 신앙역사를 율법과 하나님, 그리고 하나님을 섬기고 그 말씀의 의도대로 살게 하신 것, 그리고 그 민족의 신앙 전통을 통해서만 메시아인 예수 그리스도를 보내셨던 사실을 과소평가해서는 안 된다는 점과도 같다. 한국교회의 설교 전통은 성경말씀 중심이었다는 점을 잊지 말아야 한다.
     
    성경중심의 설교
         설교자가 교회의 강단에 섰을 때 갖는 권위는 절대적이다. 절대적이라는 것은 하나님밖에 가지지 않는 권위라는 뜻이다. 인간은 그 누구도 절대적 존재가 아니다. 그러나 목사가 성경말씀을 전파하기 위해 강단에 설 때, 그는 그의 권위를 절대화한다. 왜냐하면 그가 전파하려는 하나님의 말씀이 절대적 권위를 가졌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그 인간 자신의 존재는 완전히 부인되어야 한다. 그것은 동시에 설교자는 그가 강단에 서 있는 한 하나님이 주시는 말씀 외에는 그 무엇도 전파하거나 표현할 아무 권리가 없다는 것을 의미한다. 설교자는 자기 사상과 주장을 펴는 사상가나 웅변가나 선동가일 수 없다. 만일 설교자가 강단에 서서 하나님의 말씀을 바르고 정직하게 선포하지 않고 자기의 주장과 사상을 편다든지 혹은 다른 것을 말하는 경우에는 당장 그 자리에서 쫓겨나야 할 존재다. 사람이 내어 쫓지 못한다면 하나님 자신이 그렇게 하실 것이다.
     
         그런데 최근 한국교회 강단에 선 설교자들 가운데는 이것을 잘 알지 못해 잘못된 죄악을 범하는 경우도 있고, 오히려 그 권위를 가지고 자기의 이익을 위해 설교자로 위장하는 시몬(행8:18-20) 같은 복술사도 있는 것이 걱정된다. 스스로 알지 못해 잘못 설교한다 하는 경우는 한국교회 강단설교의 양쪽 극단에서 찾아 볼 수 있다. 한때 극히 보수적인 강단설교 중에는 성경말씀에 관한 자기 주관적 해석으로 인하여 성경이 성경말씀 자체로서 말씀하시고자 하는 바를 왜곡하는 경우이다. 그리고 성경의 내용과 구절을 자기의 개인적 체험신앙을 반증하는 정형적(定形的) 자료로서 주관화하는 경향이다. 이러한 극단적 보수주의 경향의 설교들은 성경말씀을 사물화(私物化)한다. 그 극단적인 예를 기독교적 사이비 종교집단들의 성경풀이에서 흔히 볼 수 있다.
     
         이러한 위험은 오늘날 우리나라 설교자들에게서만 비롯된 것이 아니다. 기독교가 복음을 전파하게 된 초기부터 복음의 이질성이 있었다. 즉 사도 바울이 말한 다른 복음의 출현이 그것이다. 바로 이러한 위험을 정리하기 위해 복음 선포의 정도(正道) 혹은 정론(正論)이라 할 수 있는 신앙교리체계가 확립된 것이다. 그 원형이 ‘니케아 신조’로 알려진 교회의 공동신앙고백이다.
     
         한편 극단적인 진보주의적 경향에도 위험이 도사리고 있다. 최근 어느 교회의 목사의 설교는 그것이 교회 강단에서 말해진다는 것 외에 그 내용이나 표현양식 면에서 정치선동이나 사회시평과 조금도 다를 바 없는 것이었다. 이것은 설교가 아닌 설교다. 또 다른 유형으로서 성경 또는 기독교에 대한 종교적 해설 강의 같은 설교를 듣게 된다. 설교자는 그야말로 핵심이 없는 전달자가 된다. 자기가 전하는 말씀의 내용을 믿고 안 믿고는 아무 상관이 없이 오직 방관자나 다름없는 설교자의 설교를 듣게 된다.
     
         전자는 성경말씀의 구절들을 자기 주장을 펴기 위한 예문으로 인용한다. 그러므로 성경말씀의 인용과 어느 성현이나 철학자의 경구와 논증을 혼합하고 엮어서 자기 나름의 논리와 주장을 합리화시킨다. 이들은 말하자면 저자의 동의도 묻지 않고, 인세도 지불하지 않고 해적판을 찍어 팔아먹는 악덕 장사꾼 같은 모양으로도 비춰진다.
     
         이러한 경향은 신학에서까지도 나타나 그것을 정당화할 논리를 전개하려 했던 신학자가 있었다. 성경의 이야기를 하나의 전거(典據)로서 보태려 하는 주장이다. 예수님의 십자가 죽음을 노동투쟁을 하다가 죽은 자, 민주화 운동을 하다가 희생된 자들의 죽음과 동일시하는 주장으로까지 이어지게 한다. 교회의 설교와 설교자가 강단에 서서 설교할 수 있는 특권은 하나님의 말씀의 유일적 권위로서만 주어진다. 어느 박사, 어느 사상가, 어느 작가가 예수님과 예수님의 사건, 성경과 성경이야기들을 어떻게 보고, 어떻게 풀이하고, 무엇으로 표현하는가와 설교는 내용과 질에 있어서 전혀 다르다. 교회의 강단과 그 강단에 선 설교자의 설교는 예수님과 성경을 자기의 취향에 따라 희극화하거나 만화화하는 자유사상가나 작가의 입장과는 전혀 다르다. 설교자는 주어진 하나님의 말씀과 그 말씀 속에 다양하게 계시된 하나님의 사건들의 ‘현재적 증인’이다.
     
    성경에 대한 주제파악
         설교의 제목이란 다만 한 시간 안에 설교자가 전하려는 내용을 총괄 요약한 표식과도 같다. 그러나 설교가 성경 중심에 서 있다 해도 그 성경의 중심 주제를 언제나 이탈하지 않는 설교여야 한다. 이 문제를 신학교육에서는 편의상 ‘성경신학’이란 과목 안에서 다루게 된다. 구약의 창세기로부터 신약의 계시록까지 그 내용을 포함한 시간은 무한과 무한 사이에서 진행하는 모든 시간이고, 보이고 보이지 않는 모든 공간을 완전히 포함하고 있으며, 인간 역사의 시초와 종말까지의 과정도 모두 포함하고 있다. 그리고 성경이 쓰여진 시간만 해도 천년 하고도 수백 년의 기간을 가져왔고, 그 필자들도 수없이 많다. 그러한 성경이 하나의 하나님의 말씀으로 종합되고 공인되고 수용된 까닭이 무엇이며, 그 과정이 어떠했는지에 대한 대답이 있어야 한다. 그러나 가장 중요한 것은 내가 왜 이 성경책에 기록된 말씀만을 하나님의 말씀이라고 믿고 받아들이는가에 대한 명백한 대답이 있어야만 한다. 이 대답이 곧 성경에 대한 주제파악이다.
     
         성경 안에는 다양한 이야기, 여러 종류의 사람들, 상이한 역사적 사건과 그 배경, 문화 등이 쓰여져 있는데, 이것은 왜 이 책이 성경이라고 이름 붙여지고 하나님의 말씀으로 믿어지는가에 대한 해답이다. 그것이 바로 성경의 주제파악이다. 주제의 바른 파악이 없으면 바른 설교를 할 수 없다. 어느 경우에는 구약에 있는 유대인들의 제사법을 텍스트로 하여 설교할 수 있다. 어느 경우에는 삶의 지혜를 풀은 잠언의 성구로 설교할 수도 있다. 그런데 잠언의 삶의 지혜를 신도에게 전달하기 위해 설교한다면 그 잠언 이야기 못지않은 더 많은 인생지혜서들을 성경 이외의 책에서 찾아 설교의 본문을 삼을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공자나 석가의 지혜의 글을 설교한다고 해서 그것이 교회의 설교이겠는가? 그런데 우리는 종종 그와 매우 비슷한 설교 아닌 설교를 듣는 때가 있다. 성경의 주제는 삶의 지혜나 권선징악이 아니다. 그것들도 물론 성경의 주제와 연관되어 있으나 종속적 관계뿐이다. 그러면 그 성경의 주제는 무엇인가?
     
    설교의 제목과 성경의 주제
         설교의 제목은 항상 성경의 주제 안에 있어야 한다. 그 성경의 주제는 무엇인가? 그 대답은 간단하다. 성경의 주제는 ‘예수 그리스도’다. 그가 곧 말씀이요 생명이요 진리이다. 전부의 전부다. 말씀이 육신이 되신 분이시오, 또 육신이셨던 그분이 말씀으로 우리 가운데 영존하신다. 예수님의 나심과 삶과 가르치심과 죽으심과 부활과 승천, 그 전부가 말씀의 주제다. 이것이 기독교 신앙고백의 핵심이요 전부다.
     
         부언하자면, 그것은 복음서의 편성사를 공부해보면 쉽게 파악할 수 있는 내용이다. 복음서 중에 마가복음이 제일 먼저 쓰여진 책이라고 한다. 그리고 마가복음 이전에는 예수님의 언행록이 단편적으로 쓰여 있었다고 한다. 그것을 독일 말로 켈레(Qulle)라고 하여 영어의 Q로 부호를 삼는다. 이 단편적 언행록과 복음서 저자들이 저마다 보고 듣고 또 전수받은 내용들을 묶어서 복음서가 이루어졌다고 한다. 그런데 이 편성사에서 주목되는 점은 제일 처음 쓰여졌다는 마가복음에는 예수님의 탄생 이야기나 자라시던 시절의 이야기는 완전히 생략되고 공생애를 출발할 때부터 시작하여 예수님의 최후 3년간의 행적만 기록되었다. 그중에서도 전 16장의 내용 중 예수님의 최후 일주간, 즉 십자가와 부활사건이 주된 내용이다. 이것은 무엇을 말하는가?
     
         예수님의 제자나 문도들이 목도한 예수님의 사건에서 기상천외한 사건이 부활이요, 부활이 있게 된 십자가의 죽음이었다. 예수님의 제자들과 초대 사도들은 이구동성으로 “우리는 예수님의 십자가와 부활의 증인이다”라고 했다. 부활사건은 하나님이 일으키신 사건이지 사람의 일이 아니다. 예수님이 사람의 몸을 입으시고 사람으로 계실 때에는 그렇게 확실히 알지 못했던 사실, 즉 하나님의 아들로서의 예수님의 유일 독자성을 확실히 확인하지 못했다. 그러나 부활사건으로 이것이 입증되었다. 이 사실을 목도한 제자들은 이 사건의 증인으로 나선 것이다. 사복음서의 편성사는 이렇게 하여 예수님의 부활사건, 예수님의 십자가, 그리고 그의 생애와 탄생이 기록되었다. 마태는 그들 민족의 조상 아브라함까지 거슬러 올라갔으며, 누가는 아브라함뿐만 아니라 인류의 조상인 아담까지, 그리고 그 위 하나님까지 거슬러 올라간 역사적 배경과 이어지게 하여 예수님을 전역사의 중심과 초점에 두었다. 하나님의 창조와 구원의 역사를 예수님 중심에서 재해석하게 된 것이다.
     
         그러므로 기독교의 경우 구약은 신약에 연계됨으로써 성경이요, 신약성경의 복음서와 서간들, 여러 책들은 제각기 제 목적이 특출해서 성경인 것은 아니다. 예수 그리스도, 그리고 예수님의 십자가와 부활의 진실과 진상의 의미를 충분히 나타내려는 데 완전무결하게 연계됨으로써 신약성경이 성경이 되는 것이다. 그러므로 그리스도가 증거 되지 않은 성경이해와 설교는 설교가 아니다. 십자가의 부활이 증거 되지 않는 설교는 비록 성경 전체에서 모든 성구들을 뽑아 나열해서 말한다 해도 설교가 될 수 없다. 기독교 복음진리의 전체는 예수 그리스도를 나타내는 데 매여 있고 인간과 역사와 만물, 즉 지어진 모든 것은 그리스도 예수의 십자가와 부활을 중심에 두고 부단히 거듭나고 구원을 받음으로써 그 주변에 응집되고 있다는 사실을 입증하는 것이 설교다.
     
    설교와 설교자의 진실성
         사도들은 자기들을 설교자라 하지 않고 복음의 증인, 즉 십자가와 부활의 증인이라 했다. 표현은 다르나 내용은 같아야 한다. 설교자는 복음의 증인 즉 예수님의 사건의 ‘현재적 증인’이어야 한다. 어떤 설교자는 성경은 인용하면서 성경에 그렇게 써 있다고 표현한다. 그 말을 뒤집어 보면 성경에는 그렇게 쓰여 있지만 나는 그것에 책임질 수 없다는 말로 들린다. 이는 도피구를 만드는 것이요, 무책임한 표현이다. 더군다나 예수님께 목숨은 내어 맡기고 나서는 신도들, ‘예수님을 내 주로’ 고백하고 나온 교우들 앞에서 설교자가 이렇게 불확실한 제3자적 표현을 쓰는 것은 하나님께는 물론, 청중에 대해서도 큰 모독이 된다. 설교자는 설교하기 전에 먼저 자기가 전파하려는 말씀에 생명을 걸고 고백하고 나서는 가를 자문해 보아야 한다. 자신이 믿고 책임질 수 없는 말을 목에 힘을 주어 가면서 남에게 설교할 수 있겠는가? 그것은 연극이요 기만이다. 설교의 진실성 문제다. 설교에 대한 설교자의 진실성만 보장된다면 한국교회 강단은 영적인 은혜의 열매로 채워질 것이다.
     
         성경말씀 그대로를 설교자의 믿음의 진실, 삶의 진실로서 진실 되게 증거 하게 되면 그의 설교는 이미 합격점을 넘어선 것이다. 한국교회에 백여 년 역사의 짧은 기간 동안 한민족을 송두리째 바꾸어놓은 설교들은 바로 소박하고 수식이 별로 없는 설교들, 그 설교의 진실과 설교자의 진실에서 온 열매들이다. 설교의 능력은 설교자의 지식과 기교에서 오지 않고 설교자의 진실과 그 복음의 진실에서 나온다.
     
         마지막으로 전하고 싶은 말은, 설교자는 성경책 속에 주어진 하나님의 말씀을 증언하는 사명을 진 사람이기 때문에 성경말씀 자체에 대해 깊이 공부하고 익혀야 한다는 것이다. 설교의 내용이 충실한지는 성경본문의 바른 이해와 해석, 그리고 그 본문을 통해 말씀하시려는 하나님의 참뜻을 바르게 전달하려는 가에 달려 있다. 예화와 자기 체험담, 또는 기타 상황설명을 위한 지적, 사회적 예증들은 필요한 방증(傍證)이 되기는 하나 그것이 설교의 내용을 결정짓는 요건은 아니다.
     
         그리고 성경본문의 바른 이해를 얻기 위해 많은 주석서를 참고하는 것도 도움이 되지만 어떤 설교자들은 그 주석서들의 내용을 전시적으로 나열함으로써 오히려 성경의 진실을 혼란시키는 경우도 있다. 성경공부가 지식의 충전만이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과 자기와의 만남에 연결되는 과정으로 체험되어야 한다. 바로 그 까닭에 설교자의 성경본문에의 접근이 기도와 연계되지 않을 수 없다. 설교자는 성경에 능통하고 그 말씀에 사로잡혀 말씀에 포로가 되면, 그 입에서 설교로 표현되기 전에 벌써 설교자 자신이 은혜의 감격에 녹아진다. 말씀선포는 깨달아진 은총의 감격의 외면현상일 뿐 그 다음 발생하는 결과들은 성령님 자신이 사역하시는 기적의 체험뿐이다. 설교는 수사학이나 웅변술이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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