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갈6:1-18/ 성도의 유일한 자랑 / 한경직 목사 2014-08-23 07:17:34 read : 12817
『그러나 내게는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외에 결코 자랑할 것이 없으니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세상이 나를 대하여 십자가에 못 박히고 내가 또한 세상을 대하여 그러하니라.』(갈 六․十四)
자랑한다는 것은 아마 우리 인간의 본성 가운데 하나인 듯합니다. 전에 헬라 사람들은 그들의 철학과 그들의 예술을 자랑했습니다. 로마 사람들은 그들의 권세와 그들의 질서를 자랑했습니다. 유대 사람들은 그들의 혈통과 그들의 율법을 자랑한 것입니다.
당시에 사도 바울을 반대하던 거짓 선지자들은 특별히 할례를 자랑한 것입니다. 그러면서 이방인들도 할례까지 받아야 한다고 주장을 하였습니다. 그러나 사도 바울은 말합니다.
『내게는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외에 결코 자랑할 것이 없노라.』
사실 바울도 육신으로 그 때 사람들처럼 자랑하고자 하면 자랑할 것이 없는 사람은 아닙니다. 그도 아브라함의 자손이었습니다. 배냐민의 지파였습니다.
난 지 八일만에 할례를 받았습니다. 당시의 제일 유명한 선생 가말리엘의 문하에서 수학하였습니다. 율법으로 말하면 다른 사람에게 못하지 아니하는 학자였습니다. 헬라의 학식과 지식으로만 할지라도 보통 유대 사람이 따를 수 없는 세계문화에 능숙한 사람이었습니다.
또 말도 잘하는 웅변가였습니다. 사도 바울이 육신을 따라서 자랑하고자 할진댄 자랑할 수 있는 사람이올시다. 그러나,『나에게 우리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외에 자랑할 것이 없다.』고 하였습니다.
그것은 사도 바울이 예수를 알게 되고 그 십자가를 깨닫게 된 후에는 이런 모든 육식에 관한 것, 한갓 분토로 밖에 보이지를 아니한 것입니다. 지금 그의 자랑은 오직 하나밖에 없습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이었습니다.
근 二천년을 지난 오늘날에 와서는 십자가가 한 장식품처럼 되었습니다. 예배당 종각 위에도 물론 십자가가 있고, 어떤 예배당에는 창문에도 십자가가 있고, 담에도 십자가가 있습니다.
어떤 나라에서는 국기에도 십자가가 그려져 있고 어떤 단체나 학교에서는 그 학교나 단체의 깃발에도 십자가를 그렸고, 심지어 무슨 뺏지나 목걸이나 심지어 시계 줄에도 십자가를 메어 달고 다닙니다.
그러니까 지금 이렇게 십자가를 자랑하려고 한다면 뭐 이상스럽게 들리지 않을는지 모르겠습니다. 그러나 사도 바울이 처음으로 이 말씀을 할 때는 사정이 지금과는 달랐습니다.
지금처럼 장식품으로서의 십자가는 생각도 못할 때입니다.
그 때 사람들이 안 십자가는 추악한 죄수를 사형에 처하는 형틀이었습니다. 죄수 가운데도 가장 흉악한 죄를 지은 죄수, 그것도 노예 계급 가운데 죄를 지을 때, 식민지 백성들이 죄를 지을 때만, 십자가의 형벌을 한 것입니다. 그 때는 추악한 사형 형구(刑具) 밖에는 다른 것이 아니었습니다.
그런고로 그 때에는 이 십자가는 유대 사람에게는 거리낌이 되었고 헬라 사람에게는 미련한 것처럼 보일 것밖에는 다른 것이 없었습니다. 그러나 그 때에 사도 바울은 외쳤습니다.
『그러나 내게는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밖에 자랑할 것이 없노라.』왜? 그 나무가 특별하고 아름다워서? 물론 아닙니다. 예수 님이 못 박힌 십자가는 피 묻은 나무일뿐이었습니다. 그러면 왜 사도 바울이 십자가 외에 자랑할 것이 없노라고 외쳤습니까? 그 이유는 우리들이 잘 압니다.
간단히 말하면, 지금부터 근 二천년 전 기원 三十년경 어떤 봄날 아침에 예루살렘 성 밖 골고다에서 예수 그리스도가 십자가에 못 박혀서 피를 흘리시며 죽으신 까닭이올시다. 이 예수의 죽으신 십자가가 왜 이렇게 사도 바울에게는 유일한 자랑거리가 되었습니까?
그 이유를 설명하기 위해서 사도 바울은 갈라디아서를, 로마서를, 아니 모든 서신을 썼습니다.
예수는 볼래 죄가 없었습니다. 일점(一點)의 흠이 없으신 분입니다. 그러면 죄 없는 이 예수가 어찌하여 십자가에 달려서 죽을 수밖에 없었습니까? 이것이 곧 십자가의 이야기입니다. 복음의 이야기입니다.
이 이야기를 써놓은 것이 신약전서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죽음은 보통 죽음이 아니올시다. 주님께서는 친히 말씀하셨습니다.『인자가 온 것은 섬김을 받으려 함이 아니라 도리어 섬기려 하고 자기 목숨을 많은 사람의 대속물로 주려 함이니라.』
태초에 하나님이 천지만물을 창조하셨습니다. 그리고 마지막에 우리 인간을 그의 형상으로 지으셨습니다. 인간에게는 특별히 이성을 주시고 양심을 주시고 자유를 주었습니다. 그러나 인간은 그 자유를 바로 쓰지를 못하였습니다.
그 자유를 잘못 써서 죄를 범하였습니다. 타락하였습니다. 온 인간성이 부패하였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을 알 만한 것이 그 속에 있건마는, 그 양심에 있건마는,
또한 그 지으신 만물에 능력이 보이건마는 창조주를 알려고도 아니하고 감사하지도 아니하며 오히려 그 마음이 허망하여지고 온갖 우상을 섬기게 되었고 그 정성이 타락해서 온갖 죄를 범하게 된 것입니다. 이 범죄한 인간을 어떻게 하느냐?
하나님은 공의의 하나님이 신데 공의의 하나님이 범죄 한 인간을 장차 어떻게 할 것인가? 어떤 이는 말합니다.『공의고 무어고 무조건 용서해주면 되지 아니하겠는가?』이렇게 말할 수도 물론 있습니다.
우리가 구약을 보면 사실 이러한 전례가 있습니다. 다윗의 아들 압살롬이 자기의 동생을 죽이고 멀리 자기 아버지의 얼굴을 피해서 애굽으로 달아났습니다. 다윗은 그렇게 자기 동생을 죽인 아들 압살롬을 용서할 마음은 없었습니다.
그러나 여러 대신들이 간청을 합니다.『어떻게 아들을 그냥 외국에 내어버려 둘 수 있습니까? 데려 와야 되지 않겠습니까?』자기 부인까지 와서 간청을 했습니다.
결국 다윗은 무조건 용서하고 다시 국내에 들어오는 것을 허락했습니다. 조금도 회개한 빛이 없었고 마음이 변한 것도 아닙니다. 그러나 무조건 용서해서 예루살렘에 들어와서 살게 하였습니다.
그랬더니 압살롬은 백성의 마음을 도적하기 위해서 여러 가지 간계로써 백성들을 자기에게 돌리기를 시작하였습니다. 마지막에는 불량배들을 전부 규합해서 난을 일으켰습니다. 예루살렘에 들어가서 자기 아버지를 쫓아냈습니다. 갖은 위협을 다 했습니다. 다윗은 쫓겨났습니다.
그 긴 이야기는 다할 수 없지마는 결국 다윗이 그를 그렇게 무조건 용서해준 결과는 그 자신도 압살롬 자신도 아주 망하게 말들었습니다. 공의를 무시한 용서는 받는 자손에게만 아니라 용서하는 이에게도 손해가 되었고 국가의 질서만 파괴를 당했습니다. 공의의 하나님이 이렇게 죄인을 용서할 수는 없습니다.
그러면 그 둘째 가능성은 꼭 공의에 의지해서 죄인을 벌하는 것입니다.「죄인을 벌하는」이것은 물론 정당한 법 이론이올시다.『죄의 값은 사망인데 마땅히 줄을 죄를 지은 사람은 죽여야지.』
하나님의 법정에는 의인은 하나도 없으며 다 죄를 지은 사람들입니다.
꼭 이 법 이론대로 말하면 모든 인류는 전멸할 수밖에 없습니다. 생각이 여기 미칠 때에, 하나님은 공의의 하나님이실 뿐더러 사랑의 하나님이 신데, 어떻게 하나님의 사랑과 자비가 이것을 감행할 수 있을 것인가?
여기에 말하자면, 우주의 법정에 딜레마가 있습니다. 어떻게 하여야 하나님의 공의를 세우는 동시에 또한 죄인의 죄를 용서해서 그 죄인을 죽이지 아니하고 구원할 수 있겠는가? 여기에 십자가의 신비가 있습니다. 여기에 인간의 지혜를 초월하는 십자가의 지혜가 있습니다. 능력을 초월하는 십자가의 능력이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그 독생자를 사랑으로 보내셔서 만민의 죄를 위하여 대신 형벌을 받으시고 만민의 죄를 사하여 주신 것입니다. 따라서 하나님의 공의를 세우시며 또 그의 사랑을 나타내시며 죄인의 죄를 사하여 주시고 죄인으로 하여금 구원받을 길을 크게 열어주신 것입니다.
사도 바울은 로마서 五장 八절에 말씀하였습니다.『우리가 아직 죄인 되었을 때에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죽으심으로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대한 사람을 확증하였느니라.』그 조금 전에 三장 二十六절에는 이렇게 말씀하였습니다.
『곧 이 때에 자기의 외로움을 나타 내사 자기도 의로우시며 또한 예수를 믿는 자를 외롭다 하려 하심이니라.』십자가 가운데는 죄인을 벌하심으로 하나님의 공의가 나타나서, 그러한 예수 그리스도를 자기가 주심으로 하나님의 사랑이 나타났습니다.
자기도 외롭다 함을 얻게 되시고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믿는 사람들도 의롭다 함을 얻게 만드시는 길을 열으신 것입니다. 십자가는 만민의 죄를 대속하는 대속의 죽음이었습니다.
사도 바울은『내게는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외에 자랑할 것이 없노라.』고 하였습니다. 십자가 위에서 흘린 그리스도의 보혈은 만민의 죄를 씻어서 깨끗하게 했습니다. 누구나 십자가 앞에 나아와 죄를 애통하며 회개하면 죄 사함을 받을 수 있는 길이 열립니다. 사도 요한은 외쳤습니다. 그 아들 예수 그리스도의 피가 우리를 모든 죄에서 깨끗하게 하실 것이라고.
전설에 의하면 예수 그리스도의 시체를 거두어서 묻은 아리마대 요셉이 예수를 십자가에서 내리 우기 전에 귀한 병을 준비했다가 예수 님 옆구리에서 흐르는 그 피를 그 병 가운데 담은 그 병을 잘 보존하기 위해서 어떤 섬으로 갔다고 합니다.
그 섬에서는 이 귀한 그리스도의 피를 잘 보관하기 위해서 그 병을 잘 지킬 수 있는 기사(騎士)로서, 기사단을 조직하였다고 합니다. 그리고 그 기사단의 단장은 그 섬의 왕이 되었다고 합니다.
전설에 의하건대 때때로 특별한 일이 있을 때에 그 병의 뚜껑을 열면 그리스도의 보혈을 담은 그 병 가운데서 이상한 빛이 비치어서 모든 사람의 얼굴을 비추었고, 따라서 그 빛의 비추임을 얻은 사람은 새로운 신령한 힘을 얻었다고 하는 이야기가 있습니다.
그리고 그 보혈은 능히 바라볼 수 있는 사람은 오직 마음이 깨끗한 사람만 바라볼 수 있었다고 합니다.
물론 이 전설이 대단히 아름답고 좋습니다. 그러나 한 가지만은 잘못된 생각인 줄 압니다. 그것은 깨끗한 마음을 가진 사람이라도 그리스도의 보혈을 바라보면 오히려 그리스도의 보혈이 우리의 더러운 마음을 씻어 주시는 것입니다.
우리 찬송가에 늘 부르는 말씀과 같이『샘물과 같은 보혈은 임마누엘 피로다. 이 샘에 죄를 씻으면 정하게 되겠네.』
이 샘에 죄를 씻으면 정하게 되는 것입니다. 이렇게 그리스도의 십자가는 우리 인간 양심에 때와 같이 묻은 더러운 죄를 씻어 주는 죽음이올시다. 그러므로 사도 바울은 오직 십자가를 자랑하였습니다.
그뿐 아닙니다. 이 십자가는 화목하게 하는 십자가올시다. 죄라고 하는 것은 항상 사람을 멀리하게 만듭니다. 갈라지게 만듭니다. 부가간에도 죄가 들어오게 되면 멀어집니다. 아담과 하와가 범죄 한 후에 에덴을 떠났습니다.
유다가 죄를 범한 다음에는 예수를 떠났습니다. 죄는 멀게 하고 죄는 우리로 하여금 원수가 되게 만드는 것입니다. 이렇게 인간의 범죄로 말미암아 인간은 하나님을 멀리 떠나게 되고 하나님과 인간 사이에는 담이 막히고 원수가 된 것입니다.
그런데 그리스도께서 죽으심으로 말미암아 죄인의 담이 없어질 때에 하나님과 인간은 다시 가까워 저서 화해하게 되었고 화목을 이루게 된 것입니다. 사도 바울은 로마서 五장 十절에 말씀하였습니다.
『곧 우리가 원수 되었을 때에 그의 아들의 죽으심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으로 더불어 화목 되었은즉 화목 된 자로서는 더욱 그의 삶으심을 인하여 구원을 얻을 것이니라.』
십자가는 하나님과 인간 사이의 원수 된 것을 멸하고 화목을 이루게 한 것입니다. 사실 그 십자가의 수직선은 높은 하늘에서부터 땅 끝까지 미쳐서 죄는 사함이 되고 하나님과 인간 사이에 화목이 이루어진 것입니다.
그리고 또한 그 십자가의 횡선은 인간과 인간이 다시 화목하게 되고 인간 사이에 참된 화평을 가져오게 되는 것입니다. 이렇게 그리스도의 십자가는 하나님과 사람 사이에, 사람과 사람 사이에 화목을 가져오게 된 것입니다.
사도 바울은 외쳤습니다.『그러나 오지 내게는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밖에 결단코 자랑할 것이 없노라.』
제가 들으니 독일의 어떤 예배당 위에는 조그마한 어린양을 돌에다 겨 놓았다고 합니다. 그것은 그 배후에 이야기가 있다고 합니다. 그 예배당 지붕이 좀 상해서 고치기 위해서 일군들이 올라가서 일을 하였다고 합니다. 그만 일을 하다가 일군 가운데 하나가 발을 헛디디어서 그 높은 지붕에서 떨어졌다고 합니다.
떨어진다는 것이 어린양의 위에 떨어져서 그 양이 치어 죽었습니다. 그 대시 그 일군은 살았다고 합니다. 이와 비슷하게 그리스도께서 어린양과 같이 우리 대신 묵음으로 우리 인간의 죄 사람을 받고 구원을 얻게 된 것입니다.
모세가 한 번은 광야에서 불 뱀에 물려서 죽는 사람이 많은 때에 하나님의 지시를 받아서 구리로 뱀을 만들어서 높이 장대 끝에 달아서 누구든지 그 구리 뱀을 바라보는 사람은 비록 불 뱀에 물렸지마는 죽지 않고 살게 되었다고 하는 이야기를 우리가 출애굽기에서 읽을 수 있습니다.
마찬가지로 예수 그리스도는 십자가에 못 박혀서 구리 뱀과 같이 높이 십자가에 매달려 주었습니다. 그러나 이 죽은 예수 그리스도를 바라보는 가운데 바라보는 사람들은 죄로 말미암아 죽을 수밖에 없던 사람이 새로운 생명을 얻게 되는 것입니다.
사실 옛날로부터 오늘날까지 죄 사함을 받은 사람은 오직 이 십자가를 바라보는 가운데 죄 사함을 받았습니다. 사실 큰 은혜를 받은 사람들도 이 십자가를 바라보는 가운데서 큰 은혜를 받았습니다. 성 프랜시스 같은 이도 십자가 앞에서 십자가를 바라보며 하나님 앞에 기도할 때에 신령한 은혜를 받고 죄 사함을 받는 체험을 얻은 것입니다.
모라비아 교회를 처음에 설립하고 온 세계, 우리 신교도 가운데 제일 먼저 세계 선교의 봉화를 든 진젠도로프 같은 사람도 자기가 젊은 사람으로서 어떤 미술관에 들어가서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에 달린 모습을 바라보는 가운데서 큰 은혜를 받고 자기의 몸을 하나님께 바치고 새 사람이 된 것입니다.
지금 도덕 재무장회로 전락이 되어서 좀 섭섭하지마는 옥스퍼드 운동이라고 처음에 많은 좋은 일을 한 운동이 있습니다.
이 운동을 처음에 일으킨 프랭크 북만, 그 사람도 십자가를 신령한 눈으로 바라보는 가운데서 자기의 죄를 깨닫고, 자기의 교만을 깨닫고 온전히 죄 사람을 얻고 새로운 사람이 된 것을 우리가 다 책에서 볼 수 있습니다.
우리는 이 렌트 기간에 특별히 십자가를 바라봅시다. 십자가를 묵상하십시다. 이 십자가를 우리도 자랑하십시다. 이 죄 많은 세상에 우리가 높이 들 것은 이 십자가밖에 없는 것입니다. 이 암흑한 세상에 광명을 줄 수 있는 것은 오직 십자가밖에 없습니다.
이 불안한 공포의 세상 가운데서 마음의 안심과 평화를 얻을 곳은 오직 십자가 앞에 나아갈 것밖에 다른 데가 없습니다. 사실 이 사람의 세계에서 생명의 빛을 비추어주는 것은 오직 십자가밖에는 다른 것이 없습니다.
이 환난과 고통과 죄악과 절망에서 헤매이는 모든 인류에게 우리 위에 십자가를 높이 들어서 모든 인류들로 하여금 이 십자가를 바라볼 수 있도록 하여야 되겠습니다.
여기에 우리의 소망이 있습니다. 여기에 우리의 재생의 길이 있습니다. 여기에 새 사람 되는 길이 있는 것입니다. 우리의 환경이 아무리 험악하고 나의 과거가 아무리 추악하지마는 십자가 앞에 나오는 사람에게는 새로운 소망이 있습니다.
존 밀턴이 이런 말을 하였습니다.
『인간의 영혼이 존귀한 이유는 두 가지가 있다. 첫째는 하나님의 형상대로 지음을 받은 까닭이요. 둘째는 그리스도께서 그들을 구원하기 위해서 십자가에 못 박힌 까닭이다.』
우리는 이 렌트 기간을 통해서 십자가를 바라보고 묵상하며 십자가를 높이 들고 자랑하며 십자가를 전파해서 많은 생명을 구원할 수 있기를 바랍니다. 금년은 우리 총회 五十주년 되는 희년(禧年)을 당했습니다.
우리가 이 희년을 당해서 총회에서 여러 가지 경영을 하는 가운데 한 가지 운동은 금년에는 우리 하나 하나가 배가 운동에 참가해서 한 사람이 한 사람을 구원하도록 하자는 운동입니다. 할 수 있으면 부활 주일 전에 우리가 한 사람씩 구원하도록 힘을 쓰십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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